논어성공학 11편 선진 2장 매일 자신의 행동을 세 번 반성하며 인격 수양에 힘써라.
선진편에는 제자등에 대해 평한 말씀이 많다. “공문십철”이 이편에서 비롯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따라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고생하던 사람이 이제는 다 문하에 없구나. 덕행으로 모범이 된 사람은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고 언변에 뛰어난 사람은 재아, 자공이 있었으며, 정사에 능한자는 염유, 계로가 있었다. 문장과 학문으로는 자유, 자하가 최고 였다.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 자왈종아어진채자개불급문야로다
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 덕행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요
言語:宰我、子貢。 언어엔 재아, 자공이요
政事:冉有、季路。 정사에는 염유, 계로요
文學:子游、子夏。 문학에는 자유, 자하니라
공자는 노나라에서 도덕정치를 실현시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여년의 유랑시기를 겪었다. BC 489년에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가던 중 오나라의 군대가 진나라로 칩입하자 국경 근처에서 발이 묶여 식량은 떨어지고 제자들은 굶주림 끝에 병으로 쓰러져 갔다. 초나라에서 병사를 파견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 고난을 함께 겪었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었거나 벼슬에 나가 문하에는 아무도 없다고 회상하는 내용이다. 공문십철에 더해 공자의 학문을 전승한 증삼과 자장등이 빠져 있음은 아직 그들의 나이가 년소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공문십철(孔門十哲)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 공자(孔子)의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열 명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나 예수의 12사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약 3천 명에 달하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뛰어난 72현(賢)을 꼽았고, 공문십철은 그 72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제자들을 말한다.
덕행(德行)
덕을 쌓고 행동하는 면에서 뛰어난 제자
안회(顏回): 공자의 수제자로 덕행이 가장 뛰어났으며, 공자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민자건(閔子騫):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염백우(冉伯牛): 뛰어난 덕을 지녔으나 병으로 일찍 죽었다.
중궁(仲弓): 어진 인품을 지녔다.
언어(言語)
언변과 지혜로운 말솜씨가 뛰어난 제자
재아(宰我): 재치 있는 언변으로 유명했지만, 때로는 공자의 꾸중을 듣기도 했다.
자공(子貢): 언변이 뛰어나 외교와 상업에도 능했다.
정사(政事)
정치적 식견과 행정 능력이 뛰어난 제자.
염유(冉有): 정치와 행정에 능하여 공자의 정치 활동을 도왔다.
자로(子路): 용맹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자를 호위하고 정치에도 참여했다.
문학(文學)
학문적 재능과 문예에 뛰어난 제자
자유(子游): 문학과 예악에 뛰어났다.
자하(子夏): 문학과 경전에 밝았으며, 후에 위나라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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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삼(曾參)과 자장(子張)
증삼은 공자의 도통을 계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학통은 자사와 맹자로 이어져 유교의 주류를 형성했다. 자장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했지만, 증삼만큼의 후대 도통 계승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공자의 도통 계승자
가장 중요한 계승자인 증삼은 공자의 만년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핵심 사상인 인(仁)과 효(孝)를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가장 뛰어났다.
"삼성오신(三省吾身)"을 강조하여 그는 매일 자신의 행동을 세 번 반성하며 인격 수양에 힘썼고, 이는 유교의 중요한 수행법으로 자리 잡았다.
증삼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으며, 자사는 “중용(中庸)”을 저술하여 공자의 심오한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했다.
자사의 학통은 다시 맹자(孟子)로 이어졌으며, 맹자는 공자의 인(仁) 사상을 확장하여 인성론(仁性論)을 정립하고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며 유교의 황금기를 열었다. 이 때문에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학통을 유교의 도통(道統)이라고 부른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율곡 이이도 일기(日記)를 통해 매일 자신의 학문과 행동을 성찰하고 기록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삼성오신의 정신을 실천한 좋은 예다.
임진왜란을 예견한 화석정(花石亭) 일화
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0만 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임진강 가에 화석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늘 정자의 마루를 기름에 젖은 걸레로 닦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임종 때 제자들에게 봉투 하나를 남기며 ‘나라에 큰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일렀다.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의 어가(御駕)가 왜군을 피해 피난길에 올라,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다. 날이 어둡고 비가 와서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때 대신 중 한 사람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나루 일대가 대낮같이 환해져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율곡의 뛰어난 혜안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다.
(제미나이 문서 추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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